리버풀 서포터송입니다
또한 만화 엔젤보이스에도 나오는 곡입니다.
그리고 저도 좋아하는~ 응원가이면서 그냥 들을수있는 노래입니다.
다른 응원가와 다르게 제목처럼 (선수들이) 힘들때 위로하는 노랫말과 음으로 가족이야기하듯 잔잔하고 따뜻합니다.
역사
에버턴과 리버풀
리버풀 축구 클럽의 역사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필드 경기장의 임대인이었던, 존 호울딩 (John Houlding)은 1891년 안필드구장의 전지분을 매입하고서는 임대료를 연간 10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인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 다음 해인 1892년, 안필드 경기장에는존 호울딩에 의해 1892년 3월 15일, 새로운 축구 클럽이 리버풀 시에 탄생하게 되며 8년간 안필드 경기장을 임대해 쓰던 에버턴은 바로 구디슨 파크로 구장을 옮겼다.
존 호울딩은 그의 독자적인 축구 클럽을 신설하기로 하였고, 마침내 1892년 3월 15일 리버풀 축구 클럽이 탄생하게 되었다. 구단의 최초의 이름은 "에버턴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Everton F.C. and Athletic Grounds, Ltd.), 또는 줄여서 에버턴 애슬레틱이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이미 존재하던 에버턴 팀과 이름이 헷갈릴 수 있다고 이 이름을 기각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리버풀 축구 클럽(Liverpool F.C.)이 되었다. W.E. 바클레이와 존 맥케나가 초대 공동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로 축구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영광과 오랜 좌절
리버풀은 첫 시즌에는 랭커셔 리그에 머물렀으나 우승을 차지하여, 1893–94 시즌에는 당시 2부 리그(Second Division)로 승격되었다. 전승 무패로 그 시즌에서 우승하였고,[2] 바로 1부리그(First Division)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01년에는 클럽 사상 최초로 리그 챔피언쉽을 거머쥐게 되었고 1906년에도 또 한 번 우승하였다. 1914년에는 처음으로 FA 컵결승에 올랐으나, 번리에 1-0으로 지고 말았다.[3]
리버풀은 1921 - 22, 22 - 23 두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 하였지만 그 이후 1947년 5번째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단 한번도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1950년에는 FA컵 결승전까지 오르게 되지만 아스널에게 패하게 되었다. 이후 리버풀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1954년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4]
전설의 샹클리와 파이즐리 그리고 리버풀의 다이너스티
1959년 빌 샹클리가 감독을 맡을 때까지 리버풀은 1부리그로 승격하지 못했고 샹클리가 처음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무려 24명이나 되는 기존의 선수들을 모조리 방출시키고 팀을 재정비하게 되었다.[5] 그 결과 1961년, 리버풀은 샹클리 감독이 부임한 지 두 시즌 만에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하게 되었다. 2부리그로 강등된 이후 7년 만의 일이었다.
1961 - 62시즌 다시 1부리그로 올라온 빌 생클리의 리버풀은 승격후 3시즌만인 1963 - 64시즌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리버풀 통산 6번 리그 우승이었으며 1947년 마지막 우승 이후 17년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 1965년에는 리버풀 통산 첫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65 - 66시즌에는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고 UEFA 컵 위너스 컵에도 우승을 하면서 처음으로 더블을 일궈냈다. 위너스 컵 우승은 리버풀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기도 했다.
1972 - 73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동시에 첫 UEFA컵 우승을 거머쥐게 되는데 이 UEFA컵 우승은 리버풀의 두 번째 더블이 되었다. 이듬해 74년에는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빌 샹클리는 명예롭게 은퇴하게 되었고, 어시스턴트 코치인 밥 파이즐리가 새로운 리버풀의 감독이 되었다.[6]
파이즐리 감독은 전 감독인 빌 샹클리보다 더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었고, 파이즐리가 팀을 맡은 지 두 시즌 만인 75 - 76시즌에 리그와 UEFA컵을 우승, 또 다시 더블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는 2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처음으로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우승에도 성공하고 FA컵 결승전에도 진출하여 잉글랜드 축구 사상 최초의 트레블 달성을 목전에 뒀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면서 트레블 달성에 실패하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 리버풀은 3연속 리그 우승과 2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에 성공해 다섯 번째 더블을 차지했다. 이 시즌 리그 우승 당시에는 총 42경기에서 16골만을 실점하여 기록을 세웠던 말 그대로 철벽의 수비를 자랑하던 리버풀이었다.[7] 파이즐리 감독은 1973 - 74시즌부터 1982 - 83시즌까지 총 9시즌 동안 리버풀을 이끌었는데 그동안 리버풀이 차지한 우승 트로피는 총 20개였다.(6번 리그 우승, 3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 한 번의 UEFA컵 우승 그리고 3번의 리그 컵 우승, 6번의 채러티 실드 우승, 한 번의 UEFA 슈퍼 컵 우승) 그가 감독 재임시절에 들지 못한 트로피는 FA컵 하나뿐이었다.[8] 파이즐리는 1983년 섕클리가 그랬던것처럼 명예롭게 은퇴를 하였고 그 자리에는 그의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 페이건이 맡게 되었다.
헤이젤 참사
과거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리버풀의 코칭 스태프들이 작전 구상을 하고 또 진이라고 하는 술을 팔기도 했었던 안필드 붓 룸에서 성공적인 감독들이 많이 나왔다.[9] 조 페이건 감독 또한 샹클리와 파이즐리 감독이 해낸 것을 물려받아 첫 시즌인 83 - 84시즌에 리그와 리그 컵, 유로피언 컵을 우승을 석권하게 되었다.[10] 트레블이라 불릴 수도 있겠지만 리그 컵은 FA컵에 비해 권위가 떨어지는 대회라 여겼기 때문에 사실상 트레블이라 불리지 못했다.
84 - 85시즌에는 리그 우승은 못했지만 유러피언 컵 결승에 또다시 진출해 통산 5번째 우승에 도전하게 되었다. 1985년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의 리버풀의 상대는 이탈리아의 명문클럽 유벤투스였다. 벨기에의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결승전에서 킥오프가 되기 전부터 이미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 양팀 서포터들이 서로를 향해 이것저것 던지고 있었고 그것이 심화되어 리버풀 훌리건들이 양팀 서포터들을 분리시켜놓은 펜스를 넘어 유벤투스 서포터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성난 리버풀 훌리건들에게 겁을 먹은 유벤투스 서포터들은 코너쪽의 벽으로 도망갔고 일부는 벽을 타고 경기장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벽이 낡고 오래되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대로 무너져 버려 39명이 사망하고, 6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사망자중 대부분은 유벤투스 서포터의 이탈리아 팬들이었다.
이에 개의치 않고 경기는 지속 되었으며 리버풀은 결국 유벤투스에게 패하게 되었다. 결국 경기에서 져 우승도 놓치고 응원문화에 있어서도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 된 셈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 UEFA가 직접 나서 '잉글랜드의 모든 클럽은 향후 5년간 모든 유럽대회에 참가할 수 없으며,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인 리버풀에 대해서만 10년으로 늘린다'는 내용의 중징계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후 6년으로 줄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난동을 일으킨 리버풀 훌리건들 중 14명에 대해서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11] 페이건 감독은 대참사 후 사임을 하게 되었다.[12]
고난과 극복
페이건의 사임후 리버풀의 감독직은 당시 리버풀의 스트라이커 였던 케니 달글리시가 선수겸 감독으로 리버풀을 맡게 되었다.[13] 그가 선수겸 감독을 맡을동안 리버풀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85 - 86시즌 더블을 포함해 세번의 리그 우승과 두번의 FA컵 우승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의 우승은 곧 힐스보로 참사라는 또 다른 참사에 의해 파뭍히게 되었다.
힐스버러 참사
이 부분의 본문은 힐스버러 참사입니다.
1989년 4월 15일, 리버풀은 FA컵 준결승전에 진출해 노팅엄 포레스트와 결승진출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준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는 중립 경기장인 힐스버러 스타디움(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였다. 리버풀 원정 팬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오는 바람에 뒷쪽의 리버풀 팬들이 앞쪽에 이미 많은 팬들이 들어차 있는지도 모르고 앞쪽의 팬들을 계속 밀었고(이 당시에는 모든 구장들이 거의 입석이었음)이에 지나치게 붐비는 것을 우려한 앞쪽의 일부 팬들이 펜스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14]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펜스 쪽으로 몰렸고 결국 펜스가 무너져버려 당시에만 94명이 숨지고 75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기는 중단이 되었고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4일 후에 부상자중 소년 한명이 사망해 총 사망자수는 95명이 되었고, 4년후 의식 불명 상태에 있던 한 남자가 사망해 결국 사망자는 총 96명이 되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과 안전요원들에 대한 문제, 힐스보로 경기장에 대한 안전성 문제가 도마위에 올랐고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수석 재판관이었던피터 테일러라는 재판관이 이번 사건의 원인중 하나가 '경찰의 통제 실패와 힐스보로의 입석형태에 따라 관중이 많이 몰렸다' 라고 판단하여 앞으로 반드시 상위권 리그 팀들은 홈경기장을 모두 좌석제로 개조해야 한다는 주된 내용의 골자를 다룬 이른바 테일러 리포트가 발표되기에 이른다.[15][16] 달글리시는 1990년에 선수로서 은퇴하고 감독직에 전념하지만 이듬해인 1991년 사임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 힐스보로 참사가 간접적인 이유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달글리시가 사임한 뒤에는 그레이엄 수네스가 리버풀의 새 감독이 되었다.
몰락의 시대
수네스는 92년도에 리버풀에게 5번째 FA컵을 안겨주지만 과거 감독들에 비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고 이후에는 과거 빌 생클리 시절부터 쭉 코치생활을 해왔던 로이 에반스가 드디어 감독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에반스도 95년도 리그 컵 우승밖에는 리버풀에 별다른 트로피를 갖다주지 못했고 급기야 98 - 99시즌에는 프랑스 출신의제라르 울리에와 함께 공동 감독직(co-manager)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제라르 울리에는 비영어권 출신 감독으로서는 처음이었다.(존 맥케나는 아일랜드 출신이었지만 아일랜드는 영어권 국가이다.)
하지만 공동 감독직도 얼마 못가 98년 11월 로이 에반스가 물러나게 되고 [17] 결국 울리에 감독 1인 체제로 리버풀을 이끌어 나갔다. 그가 단독으로 감독이 된 지 두 시즌 만인 2000 - 01시즌 리버풀은 FA컵, 리그 컵, UEFA컵 우승을 석권해 형식적으로는 트레블 같았지만 83 - 84시즌처럼 우승 대회의 기준에 맞지 않아 트레블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18]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수네스와 에반스와는 달리 예전 감독들처럼 성공하는 듯해 보였지만 곧바로 다음 시즌에 심장수술 이란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고 그 시즌에는 아스널에 이어 2위로 마감하게 되었다.[19] 건강이 안 좋았던 것치고는 성적이 괜찮았지만 그 다음 시즌부터는 계속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팬들을 실망시키게 되었고 결국 04 - 05 시즌에 리버풀의 감독은 스페인 출신의 라파엘 베니테스로 바뀌게 되었다.
베니테스 시대
베니테스 감독이 부임한 첫 시즌에는 리그에서 지역 라이벌인 에버턴에 밀려 5위로 마감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못하게 되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200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해 21년 만에 이탈리아의 강호인 AC 밀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른바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궈내어 팬들의 비난을 불식시켰다.[20]
원칙적으로 리버풀은 리그에서 5위를 차지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없었지만, UEFA는 디펜딩 챔피언이 다음 챔피언스리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규정 하에 차기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위와 비슷한 경우는 1999-2000 시즌의 리그를 5위로 마감한 뒤 UEFA 챔피언스리그 1999-2000의 우승을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 CF가 있었다. 그러나 차기 시즌에 조별 1라운드에서 시작한 레알 마드리드 CF의 경우와는 다르게 리버풀은 차기 시즌에 예선 1라운드부터 참가하였다.
05-06시즌에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를 꺾고 7번째 FA컵 차지하였다. 다음 시즌인 06 - 07 시즌에는 미국인인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가 팀을 인수해 리버풀 구단주가 미국인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시즌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의 경쟁력 강화와 우승을 위해 현재까지 많은 돈을 들여 이적시장에서 많은 선수들을 데려오고 있다.[21]
06-07시즌 리버풀은 다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해 05년과 똑같이 AC 밀란을 상대하게 되지만 이번엔 패하게 되었다.[22]
07-08시즌을 거쳐 08-09시즌에는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아스널 FC, 첼시 FC 등 당시 빅4에 속한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4승 2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약팀과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속출해 아쉽게 19년만의 우승 기회를 놓치고 준우승에 그쳤다.09-10시즌에도 7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 실제적으로 리버풀은 92-93시즌 프리미어리그 탄생 이후에 현재까지 리그 우승이 단 한 차례도 없는 상태이다.
2011-12 시즌
2011-12 시즌은 지난 시즌 로이 호지슨 감독이 경질된 후 남은기간 동안 임시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리버풀의 레전드 케니 달글리시가 정식 감독이 되면서 팬들이 많은 기대를 하였다. 칼링컵에서 우승을 하며 5년의 무관 세월은 끝을 냈지만 리그 성적이 좋지 못하여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하였다. 시즌 초중반 많은 무승부를 기록하며 상위권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19라운드 이후 큰 부진에 빠졌으며 약팀들에게도 많이 지면서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2004-05 시즌 이후 7년만에 지역 라이벌인 에버턴 FC에게 리그 순위에서 밀리는 굴욕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번 시즌은 8위로 마감을 하였다.(에버턴은 7위) 리그 성적은 좋지 않지만 FA컵은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결승에서 만난 첼시 FC에게 패배를 하면서 준우승을 하였다. 결국 케니 달글리시 감독은 리버풀의 정식 감독이 된지 1시즌 만에 성적 부진으로 2012년 5월 17일자로 리버풀에서 경질되었다. 그 후 브랜든 로저스 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유니폼과 앰블럼
리버풀의 홈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레드 앤 화이트였지만 1960년대 중반에 올 레드로 바뀌었다. 하지만 초창기 시절에는 계속 빨간색을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니었는데 에버턴이 안필드를 떠나고 리버풀이 창단 되고나서 두 시즌 동안은 홈 유니폼 저지를 에버턴과 똑같은 블루 앤 화이트색을 사용했었고 당시에는 에버턴 팀이 입었던 것과 거의 똑같았었다. 1894 - 95시즌부터 리버풀은 빨간색을 택했고 1901년에는 리버풀 시의 상징인 리버 새 모양을 엠블럼에 집어넣었다.[23] 향후 60년간 리버풀의 홈 유니폼은 빨간색 상의에 흰색 하의였다. 양말은 빨간색에서 검정색, 검정색에서 흰색, 흰색에서 다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1964년, 당시 감독이었던 빌 생클리는 안더레흐트전에 처음으로 유니폼을 빨간색으로 통일시키고 경기에 나설것을 결심한다. 당시 리버풀 선수였던 이안 세인트존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 | 그는 그 색깔 계획안이 강한 심리적 충격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 빨간색은 위험하고 힘이 있는 색깔이었죠. 그가 어느날 드레싱 룸으로 들어와서 로니 예츠에게 빨간색 하의 한 벌을 던져 주었어요. 그는 "이거 한번 입어보고 어떤지 좀 보자" 라고 했어요. "크리스트, 로니, 멋져 보이는군. 놀라워. 키가 7ft 정도는 돼 보이는군.""감독님, 왜 전부 다 돌리지 않은 거죠?" 나는, "왜 우리는 빨간 양말을 신지 않는 거죠? 모두 빨간색으로 하고 나가요."라고 제안했어요. 섕클리는 찬성했고 상징적인 유니폼이 탄생했죠.[24] | ” |
리버풀의 원정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흰색 상의에 검정색 하의이거나 모두 노란색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87년, 상·하의 모두 회색의 유니폼이 소개되었고, 1991 - 92시즌까지 사용되었다. 가끔 녹색 상의와 흰색 하의 유니폼도 입었었다. 1990년대에 금색과 짙은 감색, 밝은 노란색, 검정색과 회색, 베이지색 등등 여러가지 색상 조합이 있었고 2009년 현재까지 회색 유니폼과 노란색, 흰색 유니폼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25] 현재 리버풀의 유니폼은 아디다스가 디자인 하고 있으며 [26] 과거 85년부터 96년까지 리버풀 유니폼을 디자인 하기도 했었다. 다른 회사들은 엄브로가 85년까지 였고 리복이 96년부터 10년 동안 리버풀의 유니폼을 제작한 바 있다.[27] 제3의 유니폼인 청록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는 원래 챔피언스리그 원정 경기를 위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자국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거의 빨간색과 회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28]
한편 유니폼에 기업 스폰서를 새겨넣은 팀은 리버풀이 최초였다.[29] 1979년, 히타치와 계약을 맺은 뒤, 크라운 페인트와 캔디 그리고 칼스버그가 뒤를 이었다. 특히 칼스버그와는 1992년 처음 계약을 맺고 2010년까지 이어져 왔고 지금은 금융그룹인 스탠다드 차타드와 계약을 맺고 있다.[30] 현재 리버풀의 앰블럼은 방패안에 시의 상징 리버 새가 있는것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방패위에는 섕클리 게이츠에 써 있는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문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양쪽의 불꽃은 안필드 밖에 있는 힐스보로 참사 기념비에 있는 성화를 표현한 것이며, 그 타오르는 성화는 힐스보로 참사때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31]
경기장
안필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안필드 스타디움은 1884년 영국 리버풀 스탠리 파크 근처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에버턴 축구 클럽이 사용하였다.[32] 1892년 경기장 임대료 문제 때문에 에버턴 축구 클럽은 안필드 경기장을 떠났다. 안필드 구장의 소유주였던 존 호울딩이 새로이 팀을 창단했는데, 그것이 바로 리버풀 축구 클럽이다. 당시에는 안필드 수용규모가 2만 명 정도였지만, 리버풀 팀 창단후 첫 안필드 홈 경기에서 들어온 관중수는 고작 100명이었다.[33]
1906년, 경기장 한 쪽의 스탠드가 공식적으로 스피온 캅(Spion Kop)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34] 이 스피온 캅은 원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역 명칭이기도 한데 제2차 보어 전쟁당시 스피온 캅 전투에서 랭커셔 연대소속 약 300여명의 군인들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는데 그중에 많은 수가 리버풀 출신자들이었다.[35] 스피온 캅 스탠드가 가장 컸을 때는 무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는 단일 스탠드 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탠드중 하나였다. 많은 잉글랜드 경기장들이 특정 스탠드 이름을 스피온 캅이라고 지었지만, 안필드의 스피온 캅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스탠드 였고, 심지어 안필드의 축구장 규모보다 더 많은 수의 서포터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35] 이후 스피온 캅 스탠드는 힐스보로 참사 이후 안전 문제와 테일러 리포트로 인해 수용규모 축소를 검토하게 되었다. 1994년 안필드는 모든 좌석제 개조를 마치게 되며, 스피온 캅 스탠드은 12,390명 규모로 줄게 되었다.[33]
안필드 로드 스탠드는 스피온 캅 스탠드의 맞은편 골대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정 팀 서포터가 자리하고 있는 스탠드이다. 1998년에 재개조하여 현재 수용규모는 9,074명이고, 안필드 스탠드 로드는 안필드에서 가장 최신의 스탠드이다. 이 두 스탠드 사이에 12,227명 규모의 메인 스탠드(TV 카메라가 있는 쪽)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11,762명 규모의 센테너리 스탠드가 있다. 메인 스탠드는 안필드에서 가장 오래된 스탠드이며, 1973년 재개조 이후 거의 손댄 적이 없는 스탠드이다. 메인 스탠드에는 선수 대기석과 감독석등이 있다. 센테너리 스탠드는 과거에는 켐린 로드 스탠드로 알려졌었으나 구단 창단 후 100년째인 1992년에 재개조하여 센테너리 스탠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켐린 로드 스탠드는 철거되었고 주소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현재 총 경기장 수용 인원은 4만 5362명이며, UEFA 경기장 등급에서 4성급 등급을 받았다.[36][37]
2004년 7월 30일, 리버풀 시 의회는 안필드로부터 약 270m 거리에 위치해 있는 스탠리 파크에 6만 명 수용규모의 새 구장 건립계획안을 승인하게 되고 [38] 또한 2006년 9월 8일, 리버풀 시의회는 리버풀이 그 대지를 999년간 임대하는 것을 승인하였다.[39] 2007년 2월, 조지 질레트와 탐 힉스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 새 구장 건설은 재설계가 되었다. 2007년 11월, 새 구장 재설계가 시 의회로부터 동의를 얻게 되었고, 2008년 6월부터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40][41] 미국의 건설업체인 HKS, inc가 2011년 완공을 예상으로 현재 새 구장을 건설하고 있으나 최근의 경제 상황등의 여파로 개장 시기가 늦춰지고 있다.[42] 리버풀 시의 웨스트 더비에 있는 멜우드는 리버풀이 1950년대부터 훈련장으로 이용된 곳이다. 커크비에 있는 리버풀 2군과 유소년 아카데미 훈련장과는 연관되지 않는 곳이다. 멜우드 훈련장은 이전에는 세인트 프랜시스 재비어라는 지역 학교의 소유지였다.[43]
서포터
리버풀은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든 홈 경기들은 거의 매진이 되기도 한다. 현재 시즌 평균 43,398명으로 리그 5위를 기록하고 있고, 95.6%의 관중 동원율을 기록하고 있다.[44] 리버풀 팬들은 종종 그들만의 언어로써 스피온 캅 스탠드를 카파이츠(kopites)라고 언급하고 있다.[45]
리버풀 축구 클럽의 주 응원가(anthem)인 You'll Never Walk Alone은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뮤지컬 커로젤에서 따왔다. 리버풀 출신의 가수 게리 & 더 페이스메이커스가 불렀다. 이 노래는 1960년대부터 리버풀 축구 클럽의 주 응원가(anthem)으로서 불리고 있다. 다른 축구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1982년 8월 2일 前 감독 빌 생클리를 기리기 위한 섕클리 게이츠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섕클리 게이츠의 꼭대기에 이 노래이자 응원가가 장식되었다. 그리고 이 You'll Never Walk Alone은 리버풀의 엠블럼에도 들어가게 된다.
리버풀의 가장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팀은 같은 리버풀을 연고로 하고 있는 에버턴이며, 이들 간의 경기는 리버풀 시가 속해 있는 머지사이드 주를 따온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린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의 유래는 리버풀 구단의 창단자이자 안필드의 소유자 였던 존 호울딩과 본래 안필드를 쓰고 있었던 에버턴 구단과의 마찰에서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종교가 다른 것도 예를 들 수가 있는데 리버풀 팬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고 하며, 에버턴 팬들은 가톨릭교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46] 머지사이드 더비는 보통 매진이 되곤 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다른 경기들보다 많은 선수들이 퇴장 되기도 한다.[47] 또한 머지사이드 더비는 서포터들을 억지로 격리 시키지 않는 지역 더비중 하나 이기도 하다.[48] 리버풀의 다른 큰 라이벌은 맨체스터를 연고지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다. 이들 팀들이 라이벌인 주된 이유는 이들 팀들이 연고를 하고 있는 리버풀과 맨체스터가 가까운 도시이고 양 도시를 대표하는 팀들이기 때문이다.[49] 양 팀간 마지막으로 이적한 선수가 1964년 필 치스널이란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버풀로 이적한 것이 마지막이었을정도로 양 팀의 라이벌 관계는 꽤 치열하다.[50]
리버풀의 서포터들은 두 번의 큰 비극적 사건을 겪기도 했었다. 첫 번째는 39명의 유벤투스 팬들이 사망했던 헤이젤 대참사 대죄이다. 유벤투스 팬들은 리버풀 훌리건들의 공격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벽으로 도망쳤고, 벽타고 도망치려다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이후 UEFA는 리버풀 팬들을 비난하였고,[51] 잉글랜드의 모든 팀들에게 5년간 모든 유럽 대회에 출전금지를 명령하고, 리버풀에게는 별도로 10년으로 명령 하였으나 차후에 6년으로 줄게 되었다.[52] 두 번째 사건은 1989년 FA컵 준결승전, 대 노팅엄 포레스트 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당시 경기장 과다밀집으로 96명의 리버풀 팬들이 사망했었고 이는 힐스보로 참사라고 명명되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더 선은 당시 'The Truth(진실)'란 제목으로 리버풀 팬들이 사망자의 소지품을 빼앗고, 시체에 소변을 보고, 경찰들을 폭행했다고 주장하였다.[53] 그러나 이후 조사 결과 증거가 없는 거짓 정보임이 드러났고, 이는 곧 리버풀 시 전체적인 불매운동에 이르게 된다.[54] 많은 단체들이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결과를 올바르게 세웠고, 당시의 유족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서포터들이 대표가 되어 '힐스보로 재판 운동'을 벌여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에서 죽어간 96명의 리버풀 팬들을 위해 재판 운동을 벌였다.[55]
경영권과 재정
미국인 조지 질레트와 탐 힉스는 2007년 2월 6일, 前 구단주 데이빗 무어스로부터 팀을 인수해 새 구단주가 되었다. 총 2억1890만 파운드(한화 약 4천억원)를 지불하고, 인수하였다. 질레트와 힉스 구단주는 1억7410만파운드의 팀 지분과 4480만 파운드의 팀의 기존 채무를 떠안은 것이다.[56] 현재 질레트와 힉스 구단주 사이에 불화가 나돌아 팬들의 지지가 부족한 상태이며, 두 구단주가 리버풀을 인수하기 전에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두바이 인터내셔널 캐피탈(DIC)과의 매각 루머가 현재 나오고 있다.[57] 또한 리버풀 서포터즈 그룹도 구단 인수에 관심을 표명한 상태이다. 그들은 10만 명의 팬들이 주주가 되어 1인당 5천 파운드씩 총 5억 파운드를 팀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제안한 상태이다. 그러나 리버풀 서포터즈 그룹이 제시한 금액은 팀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58]
2008년 4월, 미국의 경제 미디어 포브스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아스널에 이어 리버풀을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축구 클럽중 4위로 올려놓았다. 리버풀은 채무를 포함해 1억 달러(6억 5백 유로)가치를 평가 받았다.[59] 미국의 회계법인 회사 델로이트는 세계 축구클럽들의 수입을 환산해 평가하는 2008 델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에서 리버풀을 8위에 올려놓았다. 2006 - 07 시즌, 1339천만 유로 수입으로 10위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 오른 것이었다.[60]
대중 문화에서의 리버풀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팀 중 하나인 리버풀은 영국 문화에서 축구를 묘사할 때 종종 특징적으로 삼기도 했었고 미디어에 처음으로 나오기도 했었다. 리버풀은 BBC의매치 오브 더 데이의 첫 방송에서 1964년 8월 22일, 안필드에서 벌어진 아스널과의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방송이 되었다. 또한 리버풀은 웨스트 햄과의 경기에서 컬러 TV 방송으로 처음 생중계가 되기도 하였다.[61]
영국의 락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가 부른 피어리스(Fearless)에는 리버풀 팬들의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는 리버풀 팬들이 나오기도 한다.[62] 리버풀은 1988년, '안필드 랩(Anfield Rap)'이란 랩을 발표하게 된다. 이 랩은 1988년 FA컵 결승전, 윔블던 FC와의 경기에서 존 반스가 다른 선수들과 같이 부르게 되었다.[63]
1996년, 리버풀 출신의 텔레비전 작가인 지미 맥고번에 의해 힐스보로 참사가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제작되게 된다. 각본에 짜여진 이야기긴 하지만 드라마 닥터 후의 아홉 번째 닥터로 출연하기도 했었던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이 트레버 힉스역으로 출연을 하였는데, 힉스는 그때의 참사로 십대의 두 딸을 잃게 되고, 안전한 경기장을 위한 운동을 벌이면서 힐스보로 유족 지원 모임에 도움을 주는 인물로 묘사된다.[64] 또한 리버풀은 리버풀 시를 주 배경으로 찍은 새뮤얼 잭슨의 영화 51번째 주(The 51st State)에도 나온다. 전 암살자인 펠릭스 드수자(로버트 칼라일)가 욕심 많은 리버풀의 팬으로 나오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때 찍게 된다.[65]
또한 리버풀은 스컬리라는 어린이 쇼에도 나오게 되는데, 프랜시스 스컬리라는 어린 소년을 중심으로 '어떤 팀이 리버풀을 이기려 하는가?'라고 하는 토론이 벌어졌었다. 이 방송에는 당시 리버풀의 걸출한 스타였던 케니 달글리시가 나왔었다.[66](이 방송은 1984년 방영되었던 쇼로서 달글리시가 선수겸 감독직을 맡았던 것은 85년도 헤이젤 참사 뒤부터였다.)
통계와 기록들
리버풀의 랭커셔 리그에서의 첫 상대는 하이어 월턴(Higher Walton)이란 팀이었는데 무려 8-0의 대승을 거두게 된다.[67] 리버풀 통산 최다 출장 경기는 1958 - 78 시즌 동안 무려 857경기나 출장한 이언 캘러건이란 선수가 갖고 있으며,[68] 리그 출장 횟수도 640경기로 역시 기록을 갖고 있다.[69] 현재 리버풀에서 가장 많은 출장 경기수를 보유한 선수는제이미 캐러거이며 그는 2008년 초에 500경기 달성을 기록한 바 있다.[70]
리버풀의 통산 최다 골 득점자는 이언 러시인데 1988년부터 87년, 88년부터 96년까지 346골을 기록하고 있다.[69] 이 이언 러시라는 선수는 1983 - 84시즌 47골로 한 시즌 최다 골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리버풀 선수생활 동안 러시는 로저 헌트가 기록한 245개 리그 골을 1970년 이후에는 넘어서지 못했다.[68] 1961 - 62시즌, 로저 헌트는 41개의 리그 골로 리버풀의 한 시즌 리그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어 있다.[71] 고든 호지슨은 240골로 통산 3위 랭크되어 있고,[72] 17개의 해트 트릭으로써 리버풀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69]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갯수는 5골이며 이언 러시, 존 밀러, 앤디 맥귀건, 존 에반스 그리고 로비 파울러가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3] 또한 파울러는 1994 -95시즌, 아스널 전에서 4분 32초 만에 해트 트릭을 기록해 리버풀과 프리미어리그의 기록을 갖고 있다.[74] 스티븐 제라드는 리버풀 통산 유럽 대회에서 30골을 기록하고 있어 이 부문에 팀내 기록을 갖고 있다.[69]
리버풀의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1974년, 노르웨이의 스트롬스고젯 IF이란 팀에게 거둔 11-0의 스코어다.[69] 리그에서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1896년, 로더럼 타운과의 10-1 스코어 이다.[71] 이런 9점차의 승리는 1989년, 안필드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거둔 9-0 스코어도 있다.[75] 리버풀의 가장 큰 점수차 패배는 1954년, 버밍엄 시티에게 당한 1-9 스코어 이다.[69] 한편, 챔피언스리그에서 거둔 가장 큰 점수차 승리는 8-0 스코어의 베식타스 JK전이다.[76][77]
출처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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