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시티 서포터송
맨체스터 시티 FC(Manchester City Football Club 맨체스터 시티 풋볼 클럽[*], 약칭: MCFC)는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여 1880년에 창단한 잉글랜드의 축구 구단이다. 홈 경기장은 이티하드 스타디움이다.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는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St. Mark's West Gorton)'으로 창단되었고, 창단 첫 경기는 1880년 11월에 치루어졌다. 1887년, '아드윅 어소시에이션 풋볼 클럽(Ardwick Association Football Club)'으로 구단명을 개칭한 이후, 현재의 구단 명칭으로 바뀐 시점은 1894년이다. 맨시티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로 평가받으며, 조 머서와 말콤 앨리슨의 지휘 아래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프랜시스 리 등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풋볼 리그(현재, 프리미어리그), FA컵, 리그 컵, 그리고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대에는 세 차례의 강등을 당했고, 3부리그에 강등된 시기도 있었다. 같은 맨체스터 연고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는 맨체스터 더비로 유명하다. 2007년 태국의 전 총리였던 탁신 친나왓이 구단을 인수하며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였고, 2008년 8월에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이 구단주로 취임한 이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리미어리그 2011-12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현재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은 로베르토 만치니이고, 주장은 뱅상 콤파니이다.
13-14시즌부터는 현 말라가 CF의 감독인 마누엘 페예그리니가 새롭게 지휘봉을 잡기로 계약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역사
창단부터 1930년까지
1880년, 맨체스터 서부의 고튼이란 동네에 있는 세인트 마크스 교회에서 인도주의적인 목적으로 축구 클럽이 탄생하였는데 이것이 맨체스터 시티 축구 클럽의 기원이다. 두명의 교구 위원들과 목사의 딸 안나 코넬은 지역 조직 폭력배들과 알콜 중독자들에게 종교에 개의치 않으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안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교구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개신교 신자들의 집가지 포함해) 관련 사항을 모색해 보았다. 교회의 크리켓 클럽은 이미 1875년에 창단 되었지만 겨울철엔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바로 잡고 또한 이러한 사회 악들에 개입해 전폭적인 격려로 교구 위원인 윌리엄 비스토우와 토마스 굿비히어와 함께 축구 클럽을 창단하였는데 그것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이란 클럽이다. 안나 코넬은 메이저 축구 클럽 창단을 촉진시킨 유일한 여성이다.
클럽의 첫 경기는 1880년 11월 13일로 기록되었는데 상대 팀은 매클스필드에서 온 교회 팀이었다. 1884년, 클럽은 고튼의 또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 되지만 불과 몇 개월도 안되어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 된다. 1887년, 고튼 AFC는 프로로 전향되었고, 연고지를 맨체스터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91년, 아드윅은 뉴턴 히스를 1-0으로 꺾고 맨체스터 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 결과는 아드윅이 1891 - 92시즌부터 풋볼 얼라이언스의 멤버가 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풋볼 얼라이언스는 1892년, 풋볼 리그와 통합되었고, 아드윅은 풋볼 리그 2부리그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1893 - 94시즌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어 클럽의 전체적인 개편이 필요하게 되어 아드윅은 맨체스터 시티 FC로 클럽 이름을 바꾸고 1894년 4월 16일,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었다. 1899년,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처음으로 1부리그 승격을 하게된다.
1904년, 맨체스터 시티는 크리스털 팰리스에 있는 작은 구장에서 볼턴 원더러스를 1-0으로 꺾고 처음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에는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해 아깝게 더블을 놓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시즌에는 불법 재정자금 혐의를 받게 되었고 절정에 다다랐을땐 1906년도에 주장 빌리 메레디스를 포함한 무려 16명의 선수가 퇴출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화가났던 것은 이 퇴출 당한 선수들 대부분이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가 유나이티드의 첫 번째 성공기를 가져다 주게된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하이드 로드에 화재가 벌어져 메인 스탠드가 파괴가 되었고 1923년, 맨체스터 시티는 메인 로드 (Maine Road) 로 홈 구장을 옮기게 된다.
1926년, 맨체스터 시티는 FA컵 결승에서 다시 볼턴 원더러스와 재회하지만 이번엔 0-1로 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부턴 기복이 심한 플레이로 리그에서 부진이 잇따르게 되는데 시즌 마지막 날, 강등이 되고 만다. 1926 - 27시즌에는 1부리그 승격을 목전에 두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었다. 승격 경쟁은 시즌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는데 맨체스터 시티와 포츠머스가 2위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마지막 날 브래드퍼드 시티를 무려 8-0으로 꺾었고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승격이 확정된걸로 믿고 있었지만 같은 시각, 포츠머스는 15분이나 경기가 지연되어 아직 경기가 진행중이었다. 경기 막판에 터진 골로 5-1 승리를 거둔 포츠머스는 골 평균차 (총 실점 수와 득점 수를 나누는 방법으로써 당시에는 이 룰이 적용되었으며, 골 득실차가 적용이 된 것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에는 1976 - 77시즌부터였다.)로 인해 2위를 차지하여 포츠머스가 승격하게 되었다.
아깝게 승격을 놓치게 된 맨체스터 시티는 다음시즌, 우승으로 1부리그에 승격하게 된다. 1927 - 28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줄곧 상위권을 유지하며 8위로 마치게 되는데 이 시즌에는 토미 존슨이 38골로 클럽 기록을 세우게 된다.
연속된 결승 진출과 논란 (1930년대 ~ 1950년대)
1930년대에 맨체스터 시티는 트로피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1930년에는 리그에서 3위를 기록한뒤, 1932년 FA컵 준결승에서 허버트 채프먼이 이끄는 아스널에게 막판 골로 탈락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에버턴에게 패하게 되며, 1934년, 3년 연속 FA컵 결승에 진출해 삼수만에 포츠머스를 꺾고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클럽은 1937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만 곧바로 다음시즌에 제일 많은 득점에도 불구하고 강등 당하게 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로 맨체스터 시티의 도전도 잠시 멈추게 된다. 1946년에 다시 리그가 재개되자마자, 前 주장이었던 샘 코완의 관리 아래 2부리그 우승으로 다시 승격을 하게된다.
그러나 클럽은 1949년, 은퇴한 프랭크 스위프트를 대신할 독일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만을 영입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트라우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중 하나인 독일군 낙하산 부대원 출신이었고 전쟁 포로에서 석방돼 랭커셔 주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입은 많은 항의를 유발시키게 되었고 약 2만명의 인원들이 시위에 참가 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에는 센터 포워드인 돈 레비를 주축으로 하는 포메이션인 이른바 레비 플랜 (Revie Plan)을 가지고 1955년과 1956년, FA컵 결승에 진출한다. 1955년에는 패했고 1956년에는 우승을 하였는데, 56년에 우승할 당시 버밍엄 시티를 3-1로 꺾었었는데 이 경기는 가장 유명한 역대 FA컵 결승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맨체스터 시티 구단이나 팬들에겐 논란 속에 영입한 버트 트라우트만이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도 경기를 계속 뛴 투혼을 발휘한 경기로 기억되고 있다.
영광의 시대
1963년 강등당한 뒤 조지 포이저가 감독에 오르지만 클럽의 하락세를 막지는 못했다. 최악의 순간은 1965년, 스윈든 타운과의 1-2 홈 패배를 당할때 였으며 관중 동원은 고작 8,015명 이었다. 이 경기는 메인 로드에서의 최저 관중 기록이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그 해 2부리그에서 11위를 기록하였는데 당시 맨체스터 시티 역사상 가장 최악의 기록이었다. 포이저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사임을 하게된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무렵 조 머서가 새로이 감독직에 오른다. 머서는 애스턴 빌라에 감독직에 있으면서 클럽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고 1961년, 리그 컵 우승을 하여 조그만 성공을 거뒀지만 1964년, 뇌졸중으로 애스턴 빌라를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보다 젊고, 기술적이고, 훈련시간을 잘 운용할 수 있는 그런 어시스턴트 코치가 필요했는데 그는 당시 플리머스 아가일 감독이었던 말콤 앨리슨을 선택하였다.
머서의 지휘 첫시즌인 1965 - 66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콜린 벨과 마이크 서머비 영입에 성공하게 된다. 다음시즌은 1부리그에서 15위를 기록하게 되는데 시즌 막판 17경기에서 단 4패에 그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된다. 1967 - 68시즌, 클럽은 시즌 마지막 날,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4-3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해 역사상 두번째 1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즌의 다른 하일라이트는 TV로 중계된 토트넘 핫스퍼와의 4-1 승리였는데 경기 당일날 경기장이 눈으로 뒤덮혀져 발레 온 아이스 (The Ballet on Ice) 라고 불렸었다.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맨체스터 더비에서 거둔 3-1 승리도 있었다.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더 많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되는데 1969년엔 세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하였고, 1970년에는 비엔나에서 폴란드의 구르닉 자브제를 2-1로 꺾고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대회 우승은 맨체스터 시티의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유럽대회 우승이기도 하다. 또한 그 해 첫 리그 컵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맨체스터 시티는 한 시즌 유럽 대회와 유명 컵대회를 동시에 우승한 첫 잉글랜드 축구 클럽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 클럽은 경영에 변화를 주게 되는데 조 머서가 단장직에 오르게 되고 미디어와 친화적인 말콤 앨리슨이 감독에 오르게 된다. 1971 - 72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다시 한번 리그 우승에 도전하게 되는데 3월 중순까지 4점차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즌 막판에 실망스런 성적을 이어가면서 4위로 시즌을 마쳐 흐지부지 되고 만다. 많은 팬들이 시즌 도중에 스트라이커 로드니 마쉬를 영입한 건에 대해 책임전가를 하였다. 그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팀 밸런스에 지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마쉬 자신 스스로도 훗날 인정을 하게 되었다 ""저는 1972년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우승을 잃게 만들어 손을 들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 시즌이 끝나고 머서가 앨리슨과의 불화로 코벤트리 시티로 떠남으로써 머서-앨리슨 체제가 깨지게 된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맨체스터 시티는 경기장 안팎으로 여러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비즈니스맨인 피터 스웨일스가 회장이 되며, 말콤 앨리슨은 강등권으로 치닫던 1972 - 73시즌 도중,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오랜기간 코치로 역임해 있던 조니 하트가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강등권에서 구해내고 괜찮은 성적을 거두게 되어 결국 시즌이 끝나고 정식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그를 압박했고 그의 감독 기간은 수 개월밖에 가지 못했다. 노리치 시티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론 손더스가 하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 그의 지휘 아래 맨체스터 시티는 1974년, 리그 컵 결승에 진출하지만 아깝게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리그에선 부진하게 되었고 손더스는 1973 - 74시즌 한달을 남겨놓고 해고 당하게 되었고 맨체스터 시티도 강등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前 주장이었던 토니 북이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어 안정을 되찾게 된다. 시즌 마지막날의 상대는 연고지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로써 강등을 면하기 위해서 양팀 모두 승리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前 유나이티드 선수 였던 데니스 로가 힐킥으로 득점을 성공시켜 1-0 승리를 거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강등을 확정짓게 만들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토니 북의 재임기간 동안 작은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1976년,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2-1로 꺾고 두번째 리그 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1977년에는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였다.
추락과 반격
1960년대와 70년대의 성공 이후 오랜 기간 하락세가 이어진다. 1979년, 말콤 앨리슨이 다시 감독이 되지만 아사 하트포드, 게리 오웬, 피터 반스등 팀의 스타 선수들을 파는 동안 여러 실패한 영입들로 인해 막대한 자금을 낭비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울버햄튼에서 영입한 미드필더 스티브 데일리로써 당시 영국내 이적 기록을 갱신하였지만 맨체스터 시티에선 부진하였다. 앨리슨은 한 시즌만에 물러났고 존 본드가 팀을 맡아 1981년, FA컵 결승에 진출해 토트넘과 맞붙게 되지만 재경기 접전끝에 패하고 만다.
2년뒤, 맨체스터 시티는 중위권을 달리고 있었고 감독자리가 안전할것 같아 보였지만 (당시 강등의 위험조차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도 운영진들과 논란을 일으켜 시즌도중에 해고 당하게 되며 코치직에 있었던 존 벤슨이 후임에 오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벤슨이 지휘한 19경기에서 11점 밖에 올리지 못했고 시즌 마지막 날 루턴 타운에게 패하게 되어 2부리그로 강등되는 재앙을 겪게 된다. 빌리 맥닐이 다음 감독이 되었고 위기의 한 시즌을 보낸뒤, 1985년, 1부리그로 다시 승격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1986년, 간신히 잔류 한뒤 빌리 맥닐은 다음 시즌 시작후 얼마 못가 애스턴 빌라로 떠나게 된다. 남은 시즌동안은 지미 프리젤이 꾸려나가지만 강등을 막지 못하고 애스턴 빌라와 레스터 시티와 함께 강등 당하게 된다. 프리젤은 사임을 하였고 멜 마친이 후임에 오른다.
1989년, 멜 마친의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부리그에 다시 승격하게 된다. 1989 - 90시즌은 어려운 시즌이 되었고 89년 11월, 또다시 강등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마친은 해고 당하게 된다. 前 에버턴 감독이었던 하워드 켄달이 팀을 맡아 결국 강등에 구해내었고 다음시즌인 1990 - 91시즌에는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11월, 켄달은 에버턴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34살의 미드필더인 피터 리드가 선수 겸 감독이 된다. 리드의 첫 두 시즌은 5위를 기록했지만 UEFA 컵에는 진출하지 못했던게 이 당시에는 2, 3위 팀만 진출할 수 았었기 때문이었다. 1992 - 93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9위를 기록했지만 1993 - 94시즌, 단 두 경기만을 치르고 리드는 해임 당하게 된다.
또 다른 추락
1993 - 94시즌, 맨체스터 시티에 슬럼프가 다시 찾아오게 되는데 새 감독 브라이언 호튼의 지휘 아래 16위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회장인 피터 스웨일스는 팬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결국 회장직을 맨체스터 시티의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1994 - 95시즌은 뭐 하나 나은게 없었고 암울한 후반기를 보내 강등권에서 두 계단위인 17위를 기록하게 된다. 호튼은 시즌이 끝나기 직전에 해임 당하고 사우스햄튼 감독이었던 앨런 볼을 데려오게 된다. 앨런 볼은 맨체스터 시티를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췄고 비효율적인 노장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였다. 그는 여러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선발하였고 특히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22세의 그루지야 미드필더 게오르기 킨클라제였다. 하지만 1995 - 96시즌, 끔찍한 출발을 보였고 마지막날 강등권 싸움에서 패하며 또다시 2부리그로 강등 당하게 된다. 앨런 볼은 1996 - 97시즌 도중에 해임 당했고 후임자인 스티브 코펠은 자신에게 너무 심한 압박을 가한다는 이유로 몇 주만에 사임을 하게된다. 크리스마스 무렵, 맨체스터 시티는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었고 前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이었던 프랭크 클락이 후임 감독이 된다. 결국 그 시즌엔 14위로 마치게 되었지만 다음시즌인 1998년 2월에 밑에서 5번째를 맴돌고 있었고 클락은 또 해고 당하게 된다. 남은 시즌은 前 올덤 애슬레틱과 에버턴 감독이었던 조 로일이 대신하였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날 스토크 시티 원정에서 5-2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같이 강등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포츠머스, 퀸스 파크 레인저스, 포트 베일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강등이 되고 말았다. 그 의미는 결국 맨체스터 시티가 3부리그 (당시엔 Division Two) 로 강등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클럽 창단 후 최초였다. 그리고 이 치욕은 당시 유럽대회 우승을 기록했었던 클럽들중 최초였다.
회복기
3부리그로 강등된 뒤, 맨체스터 시티는 경기 외적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데 잉글랜드의 사업가인 데이빗 번스타인이 새 회장이 된다. 맨체스터 시티는 3부리그로 강등되자 마자 첫시즌만에 2부리그로 승격이 되는데 질링엄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폴 디코프의 막판 동점골로 인해 승부차기까지 끌고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팬들은 크게 기뻐할 수 없었던 게 이웃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클럽 사상 최초와 전 세계 축구클럽들 중에서도 몇 안되는 트레블의 위업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2부리그로 돌아온 1999 - 2000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강등권 싸움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예상외로 시즌내내 자동 승격을 위해 도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즌 마지막날 2위로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정지었다.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했지만 또 부진이 뒤따르게 되는데 2000 - 01시즌, 또 다시 2부리그로 강등이 되고 만다. 이 시즌은 프리미어리그 출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강등팀이 리그 마지막 날 전에 확정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일은 시즌이 끝나고 해임 당하게 되었고 후임자리에는 前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 출신인 케빈 키건이 오르게 된다. 키건은 여러 영향력있는 선수들을 데려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에얄 베르코비치, 알리 베나르비아, 그리고 스튜어트 피어스였다. 2001 - 02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클럽의 승점 신기록을 세우며 승격을 하게된다. 당시 션 고터가 30골을 기록하고 대런 허커비가 26골을 기록하였다. 2002 - 03시즌,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해서 맨체스터 시티는 좋은시즌을 보냈는데 9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페어 플레이상을 수상해 25년만에 UEFA 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그 시즌에는 80년간 홈 경기장 이었던 메인 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리고 본래 2002년 영연방 경기대회 (Commonwealth Games) 개최를 위해 지어진 4만 8천석 규모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을 옮긴다. 그러나 2003 - 04시즌은 어려운 시즌이었으며, 시즌내내 강등권에서 머물다 결국 16위로 끝마치게 되었다.
키건은 2005년 3월경 사임하였으며, 후임에는 스튜어트 피어스가 오르게 된다. 시즌 8위를 기록해 아깝게 UEFA 컵 진출을 놓치게 된다. 2005 - 06시즌에는 매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9패를 당하는 하락세로 1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다음시즌엔 14위를 기록하게 되어 피어스는 해임 당하게 되며, 타이의 군사정변으로 망명한 탁신 친나왓이 IT기업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가지고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했다.
후임에는 사상 첫 잉글랜드 국가대표 외국인 감독이었던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오르게 된다. 그 후 맨체스터 시티는 2007 - 08시즌 내내 유럽대회 진출을 놓고 겨루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약화 되었고 결국 9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UEFA 컵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시대도 1년으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마크 휴스가 3년 계약으로 새 맨체스터 시티 감독이 된다. 휴스는 前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트라이커 였으며, 5년간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었으며, 그리고 4년을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에 있으면서 두번의 UEFA 컵 진출을 따내기도 하였다.
변혁의 시대 (2008년 ~ 현재)
본국 타이에서의 문제로 구단주 탁신의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얘기와 함께 맨시티가 다시 팔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2008년 8월 아랍에미리트의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과 술라이만 알 파힘에게 구단이 넘어갔다. 이러한 매각은 맨체스터 시티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구클럽으로 만들게 되었고 특히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호비뉴의 3250만 파운드 이적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외에도 첼시의 숀 라이트필립스,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셰이 기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크레이그 벨라미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선수진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 숀 라이트필립스는 유스 시절까지 포함해 7년간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었던 선수였다. 휴스의 첫 시즌은 모순의 본보기였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선덜랜드, 포츠머스, 스토크 시티, 아스널같은 팀들에겐 홈에선 승리했지만 원정가면 늘 패했다. 시즌 막판엔 성적이 괜찮아 7위를 목표로 했지만 토트넘에게 패하며 물거품이 된다. 컵대회에서도 모순이 이어졌는데 리그 컵 2라운드 에서 3부리그 팀인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에게 패했으며, FA컵 3라운드 에선 2부리그 팀인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홈에서 0-3 패배를 당하게 된다. 반면에 UEFA 컵에서는 잘했는데, 8강까지 진출해 함부르크 SV에게 최종 스코어 3-4로 패하게 된다.
맨체스터 시티는 그 시즌 결국 리그 10위로 마감하였고 휴스는 팀을 더욱더 강화시키고자 여름 이적시장에서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게 된다. 아스널에서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와 콜로 투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카를로스 테베즈, 블랙번 로버스에서 로케 산타 크루스, 애스턴 빌라에서 개러스 배리, 에버턴에서 졸리온 레스콧을 영입하여 막강한 스쿼드를 갖추었다. 2009 - 10시즌 개막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2-0으로 꺾었고 캄프 누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바르셀로나가 주최하는 조안 감퍼 트로피 대회 (1회성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다음 상대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를 홈에서 꺾으며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초반의 상승세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이후 11경기에서 단 3승에 그치는 등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휴스에게 상당한 부담감이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마크 휴스는 2009년 12월 19일 해임 당했으며, 후임으로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이었던 로베르토 만치니가 감독직에 오른다. 휴스의 마지막 경기는 4-3 승리를 거둔 선덜랜드와의 경기였다.
2011년 10월 2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레퍼드에서 맨시티가 맨유를 6-1로 대승을 하였다.
2011-12 시즌 맨시티는 맨유를 골득실차에서 앞서 44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2012년 5월 14일, 2011-2012시즌 마지막 38라운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와의 홈경기에서 전후반 90분이 지나고 1-2로 지고 있을무렵, 추가시간에 에딘제코가 두번째골을 성공시킨후 그다음 세르히오 아게로가 결승골을 성공시키고 극적으로 결국 맨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였다.
앰블럼과 유니폼
맨체스터 시티의 홈 유니폼 색은 하늘색 상의와 흰색 하의이다. 예전의 원정 유니폼은 상하의 모두 적갈색 이거나 빨간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 이기도 하였다. 클럽의 오리지널 홈 유니폼은 불명확하긴 하지만 1892년을 전후로 파란색을 입었었다는 증거가 있다. '유명한 축구 클럽들 - 맨체스터 시티'라 지어진 1940년대에 펴낸 이 소책자에서는 과거 웨스트 고튼 (세인트 마크스) 이 본래 암적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를 입었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1884년에는 클럽 창단이 교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백십자 (white cross) 가 새겨진 검정색 유니폼을 입었었다고 전해져 있다. 빨간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 원정 유니폼은 前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감독이었던 말콤 앨리슨 시절부터 나왔으며, 그는 이탈리아의 명문클럽인 AC 밀란의 유니폼을 채택하여 그런 색깔의 유니폼이 맨체스터 시티의 성공을 불어넣어줄 걸로 믿고 있었다.
현재의 클럽 앰블럼은 1997년 채택이 되었으며, 이전 앰블럼이 상표 등록으로 부적합해지자 바꾸게 되었다. 맨체스터 시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검독수리를 표현해 내었다. 방패의 상단부에는 맨체스터 운하를 상징하는 배를 삽입했으며, 가운데에 M.C.F.C., 그리고 하단부에 맨체스터 시를 흐르는 3개의 강을 대각선으로 표현 하였다. 앰블럼의 맨 밑에는 'Superbia in Proelia (전장의 자부심, Pride in Battle)' 이란 라틴어 표어를 새겨 넣었다. 독수리와 방패위에는 3개의 별이 있으며, 이것은 오로지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유니폼에 때에 따라 두개의 각기 다른 앰블럼을 사용 하였는데, 첫번째는 1970년에 소개된 것으로써, 1960년대 중반이후 클럽의 서류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문양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현재와 똑같은 방패 문양을 사용하였고 안쪽에 클럽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둥근 앰블럼을 표현해 내었다. 1972년에는 방패의 하단부에 랭커셔 주의 빨간 장미를 새겨넣은 수정된 앰블럼이 발표가 되었다. 두번째는 맨체스터 시티가 메이저 컵 대회 결승을 뛸때 앰블럼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맨체스터 시에서 그들의 자존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맨체스터 시의 '휘장'을 맨체스터 시티에 수여함로써 그들의 유니폼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이런 관례는 선수들의 유니폼에 어떤 종류의 앰블럼도 새겨 넣을 수 없었던 때부터 유래되었고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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